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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에 담근 마음

행복의 뜨락

2012-02-14     이명순

음력 정월, 장을 담그기로 한 날이다. 장을 담그는 것은 결혼 이후 처음이다. 어릴 적 친정 어머니가 하는 것을 봤지만 자세히는 안봤다. 친정 어머니가 담궈 놓으면 당연한 듯 가져다만 먹었고,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이 장을 담그고 보관하기엔 불편하다는 핑계로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장 담그는 일은 하루 이틀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농부가 일년 농사를 짓 듯 준비하고 기다리며 보살피는 과정들이 필요했다. 나도 한번쯤은 내 손으로 장을 담궈 보고 싶었다.

주부로서의 뒤늦은 자긍심 같은 것도 있고 언제까지나 친정에서 가져다 먹을 수도 없지 않은가.때마침 기회가 닿아 지난 가을 아는 언니 집에서 메주를 쑤었다.

함께 한 지인들과 삶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생각들을 수다와 웃음으로 풀며 같이 하는 시간들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혼자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지만 그렇게 묻어가듯 함께 어우러져 메주를 쑤며 장 담그는 법도 배우고 오가는 이야기 속에 마음도 깊어졌다.

푹 익힌 콩을 으깨어 네모난 틀에 찍어낸 후 볏짚에 매달아 말리면 메주는 완성이다. 단순한 작업으로 크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이렇게 말린 메주를 띄우는 과정이 어려운 일이다. 메주는 적당한 환경을 유지해야 잘 뜬다고 한다.

급하다고 빨리 하려고 해도 안되고 꾸준한 마음으로 정성을 담아야 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늘 변함없는 꾸준한 성품에서 정이 우러나듯 세상 이치는 자연의 흐름을 닮았다. 햇살이 따뜻하긴 해도 음력 정월인지라 바람은 찼다. 먼저 항아리를 깨끗이 씻어 놓고 메주도 씻어 말렸다.

물을 염도를 맞추는 것은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제아무리 잘 뜬 메주라도 염도를 맞추지 못하면 장 담그기는 실패한다.담그는 이의 정성과 마음, 잘 뜬 메주와 소금, 자연의 생태가 잘 어우러져야 장맛이 제대로 우러난다. 깨끗이 씻어 말린 메주를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을 부었다. 항아리 속에는 훈훈한 정과 믿음도 함께 담겼다.

이렇게 담근 장은 40여일이 지난 후 다시 된장과 간장으로 가른다. 장을 가른 다음에는 잘 발효하여 숙성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수시로 살피며 솔가지가 피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알맞은 자연 햇살과 바람 그리고 세심한 정성을 기울려야 한다. 장 담그는 일이 엄두는 안나도 과정 자체로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랜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손맛이란 것도 저울에 재듯 반듯하게 계량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렵다. 처음으로 장을 담그는 내게는 모든게 생소하지만 언니는 장 담그는건 일도 아니란다.

하지만 언니가 익숙하게 척척 해내는 일들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잘 안다. 초보와 경험자는 손맛의 간격이 크다. 오늘 담근 장이 어찌 익어갈 지 궁금해진다. 그렇게 담근 장 항아리는 햇살과 바람 좋은 곳에서 묵묵히 세월을 기다리고 있다.

설익은 우리 집 장이 발효와 숙성의 기간을 거치면 깊은 맛을 내주리라. 내 손으로 처음 담근 장이기에 애착도 가고 맛있을 거라 기대도 크다. 지난 가을메주를 쑤며 장을 담그기까지 난 좋은 인연에 감사했고 행복한 마음의 빚을 졌다.

하루 하루의 내 삶도 발효될수록 깊은 맛을 내주었으면 싶다. 살다보면 숙성의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형성되는 관계들이 얼마나 많은가. 거미줄처럼 얽혀 살아가는 관계들도 깊은 장맛을 내는 삶으로 익어가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