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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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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4.08.2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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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진 수필가
강희진 수필가

더워도 너무 덥다. 조금 전 차에서 내려 5분을 걸었을 뿐인데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사무실에 들어와 에어컨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고 체험촌을 둘러보니 한가하다. 어젯밤에도 열대야에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런 일상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어제는 조카가 다녀갔다. 초등학교 3학년과 여섯 살 사내아이와 함께였다. 아이들이 감기에걸려서 에어컨도 켜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데 아이들이 북적대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서둘러 점심을 먹자고 데리고 나가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냈다. 밖에서도 여전히 감당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여름에 남의 집에 손님이 되어 가면 죽어서 뱀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이 너무 무서웠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뱀이 된다니 절대로 여름 손님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오뉴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라는 속담도 있는데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더운 여름에 불을 때서 음식을 장만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또 부채 하나로 더위를 쫓았으니 충분히 공감한다.

그런데 어린 시절 여름에 오는 손님을 기다렸다. 한여름에 제사가 있었다. 어려서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지만, 아버지가 자손이 없는 조상 제사를 지내준다고 했다. 제삿날 저물녘이면 동구 밖에서 모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한 분이 양손 가득 보따리를 들고 오셨다. 엄마가 제사음식을 한다고 분주해지면 동구 밖으로 나가 할머니를 기다리고는 했다. 그 할머니를 우리는 봉황할머니로 불렀고 아버지가 제사를 지내준 조상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지금도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그 당시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봉황할머니의 품위 있는 행동은 어린 나조차도 조용히 귀 기울이게 했다. 또한, 평소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우리 할머니도 그분이 오면 그분의 어조로 바뀌어서 우리를 혼내는 일이 없었다. 엄마를 향해서도 손을 잡으시고 “고생하네, 고생하네” 진심을 담아 말씀하시니 엄마도 제사음식이 힘들다는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손을 움직이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오실 때마다 보따리를 풀어 우리가 자주 보지 못한 귀한 음식을 내어놓으셨다. 작은 체구의 봉황할머니가 어떻게 이고 오셨는지 놀라웠지만 당장 맛난 것에 신이 난 나는 할머니의 고생에는 신경 쓰지 못했다.

제사를 모시고 가시는 날에는 늘 눈물을 보이셨는데 아버지께 당신이 살아 있을 때까지만 제사를 지내 달라고 하시며 고맙다는 말을 몇 번씩 하고 가셨다. 그 특별한 여름 손님은 내가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오시지 못했고 그분이 왜 안 오시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했다.

남자 형제가 없어 조카뻘 되는 아버지에게 제사를 맡기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당신의 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오는 길에 바리바리 싸 오셔도 늘 미안했으리라. 그 시절에 여자로 살아가는 고단함과 함께 한여름 제사를 모시러 오는 봉황할머니의 마음이 오늘 35도의 온도와 함께 그대로 전이 되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겁다. 이제는 봉황할머니도 우리 할머니도 아버지도 엄마도 이 세상에 없다. 내 기억 속에서 아련히 그분들을 떠올리는 오늘 고향 집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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