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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이슬점
내 인생의 이슬점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4.09.09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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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이정희 수필가

초가을인가 보다. 풀밭에 이슬이 잔뜩 맺힌 걸 보면. 어느 날은 바위틈에 버섯이 까치발로 서 있다. 이슬떨이로 툭툭 칠 때마다 바짓단이 흠뻑 젖는다. 목백일홍에 올라앉은 이슬은 분홍여울로, 소나무에 맺힌 이슬은 초록비로 쏟아질 듯하다.

이슬은,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면서 생긴다. 풀밭에만 가도 지천이었지. 방울새가 쪼로롱 날아갈 때는 노래까지 푸른 비취옥이었다. 찬물내기 논에 백로가 오락가락하더니, 가을 초입에 이슬보다 서정적인 게 또 있을까. 모시 한 필 툭 던지면 온통 가을 물이 번질 듯한데…….

이슬이라고 부르면 입 속에 동그란 뭔가가 맺히는 것 같다. 누군가 밤새 둥글린 거라고 생각하면 참 예쁘다. 날아가는 산새와 실바람소리도 묻어날 법하다. 진주이슬이라고 부르면 될 성 싶다. 누가 볼까 봐 가만가만 흩뿌렸을 텐데 뜰 가득 맺히면서 들통이 나 버렸던 것.

하늘이 문득 파랗다. 오늘은 해가 늦게 떴다. 이슬이 늦잠 자는 날은 해님도 늦잠 자는 날이다. 이슬은 해가 떠야 일어나니까. 풀잎 이슬은 산새가 한 모금 먹겠지. 볕이 들 때는 보석처럼 고운 진주알로 아롱질 테니.

어쩌면 그렇게 하얀 이슬인지 탐색해 본다. 뜨락에서 본 하늘은 종일 구름을 흩어 놓았다. 어느 날은 징검다리 같은 수제비 구름과 새털구름에, 초원의 양떼처럼 떠오르기도 했다.

초가을 비가 살짝 흩뿌린 뒤에 보면 새하얀 이슬로 아롱지는 듯했다. 고여 있는 물은 파랗지만 파도가 치면 하얗게 보이듯, 영롱한 그 이슬 받아 조금씩 가을로 익어가는 것은 아닌지.

가을도 물들이는 계절이었으니까. 풀밭에서 이슬내리기염으로 시작할 때는 모르겠더니 깻잎과 콩잎을 위시해서 금빛 들판과 은행잎 단풍까지 갈수록 현란해진다. 이슬내리기염을 필두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을 텐데 이렇다 할 기척이 없다. 염색이라면 보통 문양과 색상을 정한 뒤 색소를 풀어서 끓이는데 어찌된 거지?

염색이 보통 물을 뿜어서 들인다면 가을 들판은 물기를 제거하면서 시작된다. 초가을에는 연미색이었던 것이 겨잣빛으로 바뀐다. 한나절 맺혀 있던 이슬도 볕이 나기 무섭게 말라버린다. 벼가 익을 때의 날씨는 일교차가 심하고 그 때의 하늬바람은 또 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말리는 재주가 있다. 콩이니 팥이 잡곡까지 아침이면 이슬에 잔뜩 젖었다가 순간적으로 마르면서 깔이 도드라진다.

내 인생의 이슬점을 점검해 본다. 사는 게 순조로울 때는 바람에 모두 증발되고 말았으나 힘들 때는 눈물과 탄식이 물방울로 엉기면서 특별한 의미로 바뀐다. 이슬의 고향을 찾아가 보면 깊은 밤 별들의 눈물과 달빛 올 잣는 밤새의 눈물이 있었던 것처럼. 나는 또 풀잎 이슬을 보면 세상 보석을 다 가진 듯 행복한 사람이었지 않은가.

마음의 텃밭에도 이슬은 맺힌다. 고난과 소망의 일교차가 벌어질수록 영롱한 이슬 밭으로 바뀐다. 우리 역시 소망의 날 때문에도 이슬점은 필요하겠지. 이슬을 뿌리면서 익히는 가을 속내처럼, 인생 또한 마침표도 온점도 아닌 이슬점을 찍으면서 물방울 보석처럼 빛날 때가 있으리. 그것을 소망의 목록에 적어 두었다. 가을로 접어드는 길 어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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